해피메이커 2020.03.15 19:41 조회 수 : 294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6XtntS-VA&feature=youtu.be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라 / 고후 1:8-11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하여서 영상 예배로 드린 지가 네 번째 주일, 4주째가 됩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이런 일로 인하여서 참으로 당황스럽고 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함께 격려하면서 위로하면서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심을 우리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영상 예배로 드리면서 첫 번째 주일에 우리는 시편 44편의 말씀으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고,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영상 예배 두 번째 주일에는 사순절이자 삼일절 기념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헛되지 않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주일, 지난 주일에는 사무엘상 23장의 말씀으로 “셀라 하마느곳” 다윗의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경계지어주신 바위”로 인하여서 죽음의 위기에서 안전한 피난처 엔게디 요새로 나아갔던 것처럼, 이제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잡혀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참고 말씀으로 고린도후서 1장 8절 이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전하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정말 그의 온 삶이 오직 복음으로 한 치의 땅이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한 영혼에게라도 더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그의 최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지향적인 사도 바울의 삶이 편안하거나 은혜로운 여정이라기 보다는 고난과 힘든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말 힘듭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형제들아 알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했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9절 말씀에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 가운데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귀한 신앙의 교훈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의 간증과 체험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힘에 겹고 어려웠음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감옥에 갇혔고, 매도 수 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굶주리고, 추위와 헐벗은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원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는 많이 가진 자였습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같은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탁월한 학문가로서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였으며,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또 보호받을 수 있는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꺼이 고난의 삶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주님을 핍박했던 그가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변화되었습니다. 오직 자기가 만난 그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그의 삶의 최대의 목적이었고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흔히 안 믿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아이고 저 사람은 예수 때문에 사서 고생한다” 뭐 그런 내용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생각해볼 것은 고난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 사도는 “고난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고난을 받고 벌을 받으니까 인과응보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부당하게 받는 애매한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되지?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되지? 어쩌면 코로나 사태에 있는 우리들의 그런 지금 마음가짐이요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의 고난의 유형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 고난을 참고 견디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4장에서 베드로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오히려 즐거움이 될 것이라. 영광으로 알라. 복이 될 것이다”고 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고난이든지 이 고난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가 있어야 됩니다. 삶의 유익함으로 그렇게 바꿀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3주째 그렇게 철야 늘 밤새워 기도는 못합니다마는 자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최소한의 내가 해야 할 목회자적인 예의요 하나님 앞에 성도님들 앞에 자세인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내가 왜이래야 되지? 까닭모를 그런 의문도 들고 그 누군가를 향해서 분노도 일어나고 이게 뭐냐 라는 그러나 한편 또 생각을 해봅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서 여기서 더 손해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더 주눅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생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시편 119편 71절과 67절에서 다윗은 그렇게도 하나님 앞에 노래, 고백했습니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어찌 고난이 유익이 될 수 있겠습니까만, 그 고난 가운데서 시편 기자는 “내게 유익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내가 잘못 살았는데 고난당하고 보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어서,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고 붙들며,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고, 말씀 붙들고 살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유익이라는 말씀입니다.
카네기 인생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나에게 일어난 10%의 사건과 그 일어난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인 90%의 태도로 결정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내 인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10% 밖에 요인을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90%는 그 일과 그 사건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천지를 미워도 해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생각할 때에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서 우리에게 주는 심각한 교훈도 됩니다. “저렇게 이단이 설치고 있었구나 !”라는 영적인 자각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신천지 이단 사이비를 정리할 수 있고, 저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 그렇게 되어야 되고요. 정부를 향해서 “좀 제대로 하지”라는 원망과 불평도 생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으로 인해서 미국과 프랑스, 일본조차도 한국의 방역 체계를 롤모델로 배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자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9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의 바울은 자부심이 대단한 가람이었습니다. 힘과 권력, 학문, 로마의 시민권까지 그는 의지할 수 있는 삶의 여건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서 신앙의 생애로 나아한 후에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로 돌아선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에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고난 가운데서 신앙적인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고난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이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이 시기에, 주님만 붙들고, 주님만 더욱 의지하는 신앙적인 유익을 꼭 붙들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인간이 이루어 놓은 최첨단의 문명이나 과학이 귀한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세계에서 최강대국이라는 미국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 아닙니까? 허리케인이 닥치면 피난가기 바쁘고 사회 시스템도 불능이 되어 버리고,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하고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절대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의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C. S 루이스는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고난에 처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메가폰, 확성기처럼 우리 영혼을 울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붙들 수 있는 신앙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을 바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내린 사형선고에 의해서 꼼짝할 수 없었고,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바울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체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어려운 삶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건져주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후에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바울의 간증이요 고백입니다. 여기에 “큰 사망”(텔리쿠트 다나투)은 “죽을 고비”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리쉐타이)는 말은 “끌어내어주다. 보호해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7-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사자의 입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은, 여러 가지 악한 일들에서 건져주셨고, 앞으로 저 천국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돌리겠다는 고백입니다.
찬송가 301장의 가사 중에서, 1절은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님의 크신 은혜’라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2절은 ‘몸도 맘도 연약하지만 나 새 힘 받아 살았네’라면서 오늘 살아가는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3절은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라고 미래적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건져주셨고, 건지고 계시며, 이후에도 건지시고 함께 하여 주시기를 원한다는 합당한 찬송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가정에서도 다함께 301장 찬송 같이 드릴께요.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아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10절 말씀에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구원해 주시기를 보호해 주셨고 보호하실 것이며 보호해 주시기를”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게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아찔할 때가 없었습니까? 저는 언젠가도 한 번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비오는 날 고속도로에서 앞에 가는 버스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대책없이 거의 한 바퀴 반을 돌다시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순간 정말, 외마디 “주여! 주여!” 그리고는 이상하게도 옆으로 나란히 차가 섰습니다. 내 기술입니까? 운입니까? 글쎄요.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마는 제게는 ‘은혜’였습니다. “아직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구나 살려주시는구나!” 건져주셨고, 지금도 그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이며, 다시 이후에도 이 코로나 사태에서 이런 하나님을 고백하고 체험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조국의 교회들이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정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 머리로 믿는 하나님에서 그치지 말고, 듣는 하나님에서 그치지 말고,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체험한 하나님, 바울이 지금 그거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런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건져주셨고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져주시리라. 할렐루야.
우리 지난 주에도 다윗 이야기를 했습니다. 골리앗에게 나아가면서, 물매돌 하나 들고 나아갈 때에 골리앗은 자기를 개인 줄 알고 막대기 들고 나오느냐고 했고, 사울왕과 그 형제들도 무시했지만, 다윗은 사무엘상 17:3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골리앗 앞에 설 때에 다윗은 지난날의 건져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그때 건져내셨은즉”, 지금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즉 보호해 주시고 승리케하여 주시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체험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체험해서 아는 하나님,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안다”(야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체험하여 안다는 의미로 쓰는 말인 것입니다. 사사기 2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아멘
그러나 10절은 무어라 이야기합니까?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은 사사기의 비극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더불어서 출애굽과 가나안을 정복하는 모든 여정에서 그것을 보고 체험한 자들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이 죽은 후에 태어난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신앙을 잘 전해주지 못했고, 하나님을 체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힘든 시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게 만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그 은혜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11절의 말씀에는,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며, 간절하고 처절해지게까지 합니다. 지금 편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장로님들과 권사님 몇 분과 예배드립니다마는, “이 예배가 익숙해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때에,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더욱 간절해지는 마음이 다시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10시 부터는 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또 자기 전에 12시 쯤에는 지역을 좀 걸었습니다.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를 상상하며 주님이 지경을 넓혀 주시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영적 지경이 넓어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또 만만치 않고 날씨 변덕도 심하고 그래서 요즘은 차를 타고 한 두 바퀴 돌면서 기도하고 그렇게 잡니다.
성경에서 고난 가운데있는 바울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도와달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사람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주 중에 구역장님들에게 전화를 통해서 소식을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기도가 간절해 진다는 문자가 오기도 합니다. “목사님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자를 통해서 목사는 힘이 납니다. 바로 그런 기도 말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보면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있는데, 은사는 기도로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떨어져 있어도 기도로 연결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입니다.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시편 50편 15절의 말씀입니다.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고난은 감사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참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건져주다”는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때를 주실 줄 믿습니다. 또 힘들어 보니까 예배가 감사였습니다. 성도님들과 함께 주일 되면 왁자지껄하면서 찬송하고, 주의 말씀에 같이 ‘아멘’하고, 그 예배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마스크 한 장이 이렇게 귀한 줄 몰랐습니다. 약국을 운영하시는 이수충 장로님이 마스크를 몇 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어떤 선물보다 감사했습니다. “건지셨고,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의지하고 나아가는 많은 사람의 기도가 결국 우리를 많은 감사로 이어지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